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해가 서산에 걸리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우리 가족의 특별한 일과가 시작됐다. 낮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달궈졌던 마당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그 시간,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아버지 오셨다!" 멀리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우리 남매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땀에 젖은 옷자락을 붙잡고 "아버지!"를 외치는 우리를 보며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에도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등목이었다. 마당 한쪽에 자리 잡은 우물에서 오빠가 팔뚝에 힘을 주며 펌프질로 퍼 올린 차디찬 지하수는 아버지의 피로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어휴, 시원하다." 아버지의 시원한 한숨 소리와 함께 우리의 여름밤은 본격적으로 열렸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마당에 놓인 평상에 둘러앉았다. 어머니가 정성스레 준비한 찬들이 소박하지만, 정겨운 식탁을 채웠다. 시원한 열무김치, 바삭한 감자전, 달콤 짭짤한 멸치볶음... 모두가 한 숟가락씩 떠먹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회사 이야기, 어머니의 장보기 에피소드, 우리 남매의 학교생활까지, 소소한 일상이 웃음 속에 녹아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우자, 아버지는 어김없이 마당 한가운데 모깃불을 피우셨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마치 신호탄처럼 우리에게 여름밤의 진정한 시작을 알렸다.

"얘들아, 수박 먹자!" 어머니의 부르심에 우리 남매는 달려갔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고르고 골라 사 온 커다란 수박을 반으로 가르고 숟가락으로 속을 파내어 큰 대접에 담았다. 빨간 수박 살과 하얀 속, 까만 씨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화려한 보석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내뱉었다.
"여보, 얼음 좀 깨 주세요." 어머니의 말씀에 아버지는 얼음통에서 커다란 얼음덩이를 꺼내셨다. 긴 바늘과 망치로 얼음을 깨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겐 작은 공연과도 같았다. "탕탕!" 얼음 깨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질 때마다 우리는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깨진 얼음을 수박화채에 넣고 설탕을 뿌린 뒤 시원한 물을 부었다. 어머니의 솜씨로 만들어진 수박화채는 그 어떤 고급 디저트보다도 맛있었다. "자, 이제 다 됐다!" 어머니의 말씀에 우리는 작은 대접에 수박화채를 나눠 담았다. 첫 모금을 들이키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함께 시원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여름의 더위가 순식간에 달아나는 듯했다.
모깃불 주위에 둘러앉아 수박화채를 먹으며 우리는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학교에서 말이야…." 내가 말을 꺼내면 가족들은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 아버지의 격려 말씀, 오빠의 장난기 섞인 농담이 어우러져 웃음소리가 마당에 가득했다. 때로는 진지한 이야기도 오갔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 어머니의 꿈에 관한 이야기, 우리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 모든 대화가 모깃불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져 갈수록 주변은 고요해졌지만, 우리 마당은 여전히 활기찼다. 귀뚜라미 소리, 풀벌레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모깃불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행복한 미소를 나눴다. 그 순간, 세상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했고, 때때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다. 아버지는 별자리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고, 어머니는 옛날이야기로 우리를 웃게 만드셨다.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어느새 잠이 쏟아졌다.
"자, 이제 들어가자." 어머니의 말씀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모기장을 치고 누워도 귀에는 여전히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코끝에는 모깃불 연기 냄새가 맴돌았다.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여름밤의 추억을 안고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여름밤의 추억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지금도 무더운 여름밤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 짓게 된다. 아버지가 깨주신 얼음으로 만든 시원한 수박화채의 맛, 모깃불 주위에서 나눈 이야기들, 그리고 밤의 소리와 함께한 그 순간들은 내게 살아가는 힘이 된다.
요즘엔 큰 얼음을 깨는 대신 냉장고에서 얼린 작은 얼음으로 수박화채를 만든다.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맛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다. 수박화채를 한 입 먹을 때마다 어린 시절 여름밤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그 시절 느꼈던 가족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만들어낸 행복한 기억들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싼다.
때로는 일상에 지쳐 힘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여름밤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든든한 등허리, 어머니의 다정한 미소, 오빠와 나누었던 장난기 어린 대화들….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언젠가 나도 내 아이들에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주리라고.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언젠가 나도 내 아이들에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주리라고. 인생은 수많은 순간들의 모자이크이며, 그 중 가장 빛나는 조각들은 가족과 함께한 시간들이다.
여름밤의 모깃불과 수박화채, 그리고 가족과 함께한 그 순간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사랑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이 추억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남아, 앞으로도 나의 삶을 따뜻하게 비춰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 추억이 나의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져, 그들의 삶도 아름답게 물들일 것이라고.